투탕카문과 신들의 전쟁
한국일보 2009년 7회 연재 (6월 25일, 7월 2일, 7월 9일, 7월 16일, 7월 23일, 7월 30일, 8월 6일)
조은석 목사 (금문교회 담임)
글 싣는 순서
1. 투탕카문
2. 신들의 전쟁
3. 아케나텐 (상/하)
4. 모세와 요시야 (상/하)
5. 전쟁이후
1. 투탕카문
이집트 파라오 아모세 1세는 이민족 힉소스를 추방하고 치욕스런 그들의 식민통치를 종결시켰다. 민족자존의 기치를 내걸고 제18왕조(주전 1552-1305)를 열었다. 역사가들은 이때부터 고대 이집트의 “새왕국시대”(주전 1552-1069)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새왕국은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 포함한다. 새왕국은 “구왕국”(주전 2686-2181)의 영화를 회복하고 민족주의를 표방한 강성 이집트를 구축했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실용성이 떨어지는 거대한 피라미드 문화를 청산하고, 그 에너지를 실질적인 토목과 건축, 정복사업 등에 사용했다. 장례행렬을 중이집트 테베 서쪽에 자리 잡은 “왕들의 계곡”으로 돌려 골짜기에 파라오들을 묻기 시작했다.
기억해야 한다. 제18왕조는 “모세”와 “출애굽”의 왕조다. 그들은 유독 많은 스타 파라오를 배출했다. 열두 명 파라오 대부분이 스타다. 오늘은 투탕카문이 단연 눈에 띈다. 제1대 파라오는 아모세 1세다. 소위 “요셉을 모르는 새 왕”(출 1:8)이다. 요셉을 포함한 이민족의 역사를 이집트에서 말살, 영구제거하기로 작정한 민족주의자였다. 가뭄으로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이집트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요셉과 이스라엘 민족을 잊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요셉을 모르기로 한 새 왕”인 셈이다. 역사왜곡의 한 모습이다. 제2대는 히브리인 남자 아기를 나일강물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린 아멘호텝 1세다. 이스라엘을 수장해 버리기로 했지만 실패하자 강제노동 노예로 삼았다. 아모세 1세의 반 타민족 정책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제3대는 투트모세 1세로, 갈대상자를 발견한 그 “공주” 핫셉수트의 아버지다. 제4대는 투트모세 2세다. 핫셉수트의 배다른 오라버니면서 동시에 남편이다. 제5대 투트모세 3세가 그 악명 높은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다. 열 번째 재앙 때 장자를 잃었다. 제6대 파라오는 모세를 건진 “공주” 핫셉수트다. 그녀는 투트모세 3세를 섭정했고, 관리를 살인한 모세를 찾던 바로 그 파라오였으며,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던 중 사망했다. 살해되었을 것이다. 제10대 파라오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유일하게 일신교 개혁을 실시했던 아케나텐이다. 제11대 파라오는 아케나텐의 아내로,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꼽히는 네페르티티다. 제12대 파라오가 오늘 우리의 주인공,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에 의문사로 세상을 떠난 투탕카문(Tutankhamun, Nebkheperure, 주전 1347-37)이다. 제18왕조는 어린 투탕카문을 섭정하다 시해의 의혹을 남긴, 관리 출신의 두 명 파라오 아이와 호렘헵을 더 두었지만, 곧 그 유명한 파라오 “람세스” 가문이 통치했던 제19왕조에게 바톤을 넘겼다.
1917년,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왕들의 계곡 탐사를 시작했다. 1922년, 그는 어떤 계단 하나를 발견했다. 그 길로 따라 올라가니 깨진 벽돌 등 잡석들로 가득찬 복도와 네 개의 작은 방들로 구성된 무덤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보물이 나왔다.
금문공원 안에 자리 잡은 드영뮤지엄은 최근에 새롭게 단장을 끝냈다. 새 단장이라지만 거의 신축이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의 꽃”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엄청난 하드웨어 때문이 아니다. 소프트웨어다. 6월 27일부터 투탕카문을 소개한다. “투탕카문과 파라오들의 황금시대”라는 주제다. 모두 130여 점을 전시한다. 경제적으로 모두 위축된 가운데 샌프란시스코가 정말 과감한 배팅을 한 것이다. 과연 샌프란시스코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다. 회원도 투탕카문 섹션 입장 때는 추가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투탕카문을 땅에서 발굴해 낸 세계 고고학계는 물론이다. 문화, 예술, 종교, 건축, 도대체 세상이 모두 그를 주목한다.
물론 투탕카문은 샌프란시스코가 처음은 아니다. 30년 전인 1979년에 온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정보의 양만 많아진 것이 아니다. 질이 대단히 높아졌다. 그동안 DNA 검사와 법의학의 실험 등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적 여과를 거쳤다. 정보가 질로 새로워지면 유물들의 표정도 달라지는 법이다. 애매모호하던 표정이 걷히고 귀에 생생한 목소리를 낸다.
경제 한파로 풀죽어 있던 샌프란시스코가 분주하다. 잠에서 깨어났거나 기절했다가 살아난 얼굴이다. 6월 17일 수요일자 SF크로니클은 “Bay Area” 섹션 1면 톱기사에서 나무로 깎은 투탕카문 토르소를 운반하는 전문가들의 표정을 조명했다. 신문은 “살아있는 왕을 대우하는 수준”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1922년, 고고학자들은 왕들의 계곡 KV 62에서 투탕카문의 미이라를 발견했다. 3,259년이나 땅 속에 묻혀 있던 시신이 햇빛을 본 것이다. 다른 파라오들과 달리 그의 무덤은 전혀 도굴꾼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곁의 다른 파라오들을 도굴하기 위해 쌓아 둔 흙더미가 도리어 안전장치로 작용했다. 그에게만 다행은 아니었다!
투탕카문(Tut-ankh-amun), “상이집트 헬리오폴리스의 지배자 아문(Amun)의 살아있는 이미지”라는 뜻이다. 테베의 지역신에 불과했던 아문은 중간왕국(2055-1650) 때 신들 중의 신으로 격상했다. 양의 머리를 한 신상이나, 플럼 이파리 두 장으로 묘사한 왕관이 특징이다. 아문은 혼합종교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린 신인데, 예를 들면 태양신 “라”와 결합하면 “아문-라”가 되고 풍요의 신과 결합하면 “아문-민”으로 나타났다. 투탕카문은 그 이름부터 혼합종교 숭배자의 이미지를 풍긴다.
투탕카문은 9세에 왕위에 오른 뒤 10년 만인 19세에 세상을 떠난다. 병사했을까? 모른다. 최근에 그의 미이라 두개골을 특수촬영, 뒷면 하단에 심각한 상처를 발견했다. 주도면밀한 방법으로 살해되었을 것이다.
그는 167cm의 작은 체구였다. 당시 발견된 왕관과 정확하게 골격이 맞는다. 그러나 그는 잘생겼다. 소위 “꽃미남”에 속한다. 보통 다른 파라오들은 “신적 이미지”가 강조되어 인간적 면모는 숨겨지게 마련이다. 투탕카문의 경우 겨우 소년기를 벗어난 10대 후반의 앳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잘 보존된 미이라를 포함하여 수많은 찬란한 부장품들이 눈길을 끈다. 누가 이 젊은 파라오의 장례를 이처럼 거창하게 치렀을까? 왜 파라오의 신적 이미지가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했을까? 왜 그랬을까?
더욱이 아비도스와 카르낙의 전통적인 파라오 리스트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있다. 말하자면 그는 “신”은 물론 “파라오”도 아닌 존재로 여겨졌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실 투탕카문의 묘는 찬란하지 않았다. 작고 초라했다. 다만 도굴을 피했고, 그래서 “모든” 부장품들이 우리 손에 들어왔기 때문에 대단해 보인다. 어떤 “축소”와 “왜곡”이 깔려 있다. 그의 묘지 발굴을 놓고 우리는 숨어있는 의도까지 읽어야 한다.
2. 신들의 전쟁
고대 이집트의 신들은 많다.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들의 관계는 어땠을까? 평화공존 했을까? 아니다. 역사 속에 드러난 이집트 신들의 관계의 기본은 갈등이다. 우선 인간전쟁이 신들의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심하면 파라오가 바뀔 때마다 신들의 위상이 급격하게 달라졌다. 말하자면 신들은 인간 전쟁을 대리전의 양상으로 이끌며 서로 싸웠다.
재미있다. 인간사회처럼 신들 사회도 전쟁이 있다. 사랑하다가 미워하며, 연합하다가 헤어진다. 하늘 저편에 번쩍이는 번개와 산천을 뒤흔드는 천둥처럼 신들은 무서운 속도로 싸웠다. 이긴 자가 졌고, 패했던 자가 칠전팔기 했다. 한층 더 흥미로운 게 있다. 신들의 전쟁에 인간이 끼어들었다. 지상에 살던 인간이 공중으로 뛰어오른 게 아니다. 이 땅에서 인간은 신적 성격의 전쟁을 실시했다. 저들의 군장과 깃발에 신들이 드높았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개시했고, 신의 이름으로 파괴했다. 신의 이름을 부르다 죽어갔고, 신의 이름으로 땅에 묻히거나 골짜기에 버려졌다. 아니다. 사실대로 말해 보자. 참 하나님 아닌 모든 신들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품 아닌가! 허구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신들의 전쟁을 구성, 제작하고 연출했다. 신적 전쟁이란 결국 인간의 전쟁이다. 정치적 의도로 제작된 신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구실이었다.
생각해 보자. 여러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든” 신을 다 섬길 의무가 없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처럼, 사고 싶은 것만 사면 그만이다. 모든 신들은 상징으로 그친다. 그러니 인간이 몸에 장식품을 달듯, 어떤 신들이나 선택의 대상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고대 이집트는 인간도 신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다. 파라오는 “신의 아들”이다. 백성은 파라오를 여러 신들 중의 하나로 여겼다. 그러나 여기 주목할 것이 있다. 다른 신들과 달리 파라오는 정치적 인격이다. 나무나 쇠로 만든 신들은 가만히 있지만 파라오는 통치한다. 그의 결정에 따라 백성들은 세금을 내야 한다. 군대징집을 당해야 한다. 딸들을 시녀로 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파라오는 이미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적어도 파라오에 관한 한 백성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로마도 다신 사회다. 초기 기독교가 생성되고 발전하는 데 다신사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기독교도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인정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도 인간이 신들의 전쟁에 끼어들었다는 데 있다. 인간 황제가 신이 되었다. 초기에는 죽은 황제를 신격화하는 데 그쳤다. 그런데 점점 살아있는 황제가 신으로 승격되기 시작했다. 이집트를 닮은 것이다. 황제는 정치적 인격이다. 황제가 신이 되었다면 그는 이미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백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황제를 섬겨야 한다. 황제의 정치-종교적 결단을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럴 수 없었다. 이것이 교회가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게 된 근거다.
살아있는 통치자를 신격화한 점에서 일본은 이집트-로마의 맥과 대단히 유사하다. 하지만 문화-종교적 연결고리가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다. 인간성이 문제다.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인간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인간이 신으로 군림한다. 오늘은 자본이 인간화 한 기묘한 신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통치했을 때, 교회는 일제에 협력할 수가 없었다. 독일의 고백교회와 모양은 다르지만, 한국교회는 반일 내지 항일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회는 당연히 항일이다. 일제는 한반도를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으로 합병하는 데까지 몰아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가 문제였다. 바른 기독교는 다신교 사회에 순응할 수 없다. 게다가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신이 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루터 당시의 종교개혁을 생각해 본다. 결국 “신학”이나 “이념” 문제였다면 내부에서 싸울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이 내세운 바, 신격화 된 인간 문제는 어떻게 타협과 토론으로 해 볼 여지가 없다. 떨치고 나와야 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이다. 면죄부 사건은 정말 빙산의 일각이었다. 본질보다는 파생된 문제 한 조각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유일신 신앙과 다신 신앙의 문제였다.
다신 신앙은 인간숭배로 간다. 인간숭배는 물질숭배로 귀결된다. 정치권력을 소지한 자의 인격이 신으로 격상(格上)한다. 정치권력의 근간은 물질이다. 그래서 물질이 인간을 신격화하고, 신격화 된 인간의 통치는 물질숭배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물질이 되는 것이다. 비인간화(de-humanization)다.
오늘 시대에 뉴에이지가 수면에 떠올랐다. 뉴에이지는 서양문화에 동양문화가 침투해서 난 결과물이다. 이질적인 문화가 결합한 괴물 형태다. 이집트 신으로 보면 몸은 사람인데 머리가 양(아문, 크눔, 베스)이나, 매(몬투, 라), 악어(소벡), 비비(토트) 그런 여러 종류의 동물이다. 이것저것 섞여 있다. 비빔밥 같이 제3의 예술적 결과물을 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치적인 면에서 보자면 “합종연횡”(?)이다. 춘추전국이다. 실로 “혼돈하며 공허한”(창 1:2) 창조 이전의 무질서다.
뉴에이지의 기본 정서는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불교의 “해탈”과 흡사한 논리다. 그러나 기독교는 선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창조주, 인간을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품는 정서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표현한 바, “공포와 전율”이다. 칼 바르트(K. Barth)가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은 “절대타자”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흐른다. 오직 참 신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그 브리지가 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존재와 사역이 “비밀”이다.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는 것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소망이 있지만, 결코 예수님처럼 되지 못한다.
신들의 전쟁. 그렇다. 이 세상을 가만 보면 영적 전쟁터다. 인간의 전쟁은 아니다. 대리전이다. 인간은 불쌍하게 사용될 뿐이다. 어리고 유약한 투탕카문이 아이(Ay)와 호렘헵(Horemheb) 같은 실권자 신하들의 손아귀에 놀아났던 것처럼.
그렇지만 우리의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과 칼과 창을 사용하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다른 신들은 “거짓”이며 “우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다. 다른 사람 누구의 피를 흘리는 싸움이 아니다. 도리어 생명의 전쟁이다. 살리자는 운동이다. 결국 그 전쟁터는 우리 내면이다. 우리는 어떤 신을 섬겨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세겜 들판에 운집한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6). 영적 결단이다. 누구를 섬길 것인가? 하나님이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수 24:16-18).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
3. 아케나텐
제18왕조 제10대 파라오 아케나텐은 이집트 종교 역사상 가장 특이한 일을 꾸몄다. 그의 재위 제5년에 종교개혁을 실시한 것이다. 아문을 위시한 모든 신들을 버리고 태양신 아텐(Aten/Aton)을 유일신으로 삼았다. 그는 본래 “아멘호텝”이었는데 그 뜻은 “아몬은 만족한다”였다. 그런데 스스로 이름을 “아케나텐”(Akh-en-Aten/Aton)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아톤이 형통케 한다” 라는 뜻이다. 아문(Amun) 신의 도시 테베(Thebes)를 버리고 아마르나로 천도했다. 신들의 전쟁에서 아문이 아톤에게 완패한 것이다. 아텐은 아문만 아니라 모든 신들을 패퇴시켰다. 아마르나는 하이집트 가운데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다. 오늘은 텔-엘-아마르나(el-‘Amarna)라고 부른다. 이것이 “아마르나 개혁”이다. 이집트가 아마르나를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아마르나 시대”라고 부른다. 아마르나는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건설된 약 15년 후에 파괴되었다. 아케나텐의 종교개혁이 겨우 15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말이다.
아마르나 시대는 제9대 파라오 아멘호텝 3세(1402-1364)부터 제10대 아멘호텝 4세(“아케나텐,” 1364-51), 제11대 네페르티티 (“네페르네프루아텐,” 1351-47), 그리고 제12대 투탕카문(1347-37)까지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시대(1397-1357)와 초기 사사시대(1357-1040)와 대략 일치한다.
아텐은 태양신이다. 아케나텐의 개혁으로 아텐이 독존했다. 다른 모든 신들은 파괴되었다. 전통적으로 다신공존에 익숙했던 고대 이집트 역사가들은 그 시기를 악몽으로 묘사했다.
아케나텐의 아텐 신앙은 왕들과 엘리트에 국한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그 대신 왕을 신으로 받들게 했다. 이에 비하여 요시야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의 유일신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개혁했다. 아케나텐의 아텐 신앙은 지적이고 추상적이며, 이상적이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공감대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어땠나? “출애굽의 하나님”이었다. 역사의 하나님이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기억하고, 예배드릴 수 있다.
그의 후계자는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였다. 그때부터 조금씩 아문-레(Amun-Re) 신앙과 절충 시도가 시작되었다. 아케나텐의 개혁에 대한 반대가 급속한 탓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아텐만 섬기는 아테니즘(Atenism)은 지워지고 잊혀졌다. 바로 투탕카문 통치 때다. 투탕카문은 유일신 개혁을 원점으로 돌려버린 파라오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투탕카문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은 데서 적어도 이집트는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달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투탕카문을 이해할 필요가 생긴다.
후대에 의해서 유일신 종교개혁자 파라오 아케나텐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런 이상주의적 비전이 혼합주의적이며 다신적 신앙으로 대체되면서 이집트는 다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히타이트족이 하비루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를 무너뜨려, 서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람세스 2세(Ramesses II, 주전 1279-1213) 때 와서 세계적 강대국으로서의 이집트 제국을 형성했다. 나는 람세스 2세가 아테니즘을 부활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라면, 그는 다신론자다. 그는 여호와 신앙의 유일신적 성격을 증오했을 수도 있다.) 그는 카데시(Qadesh) 전투에서 힛타이트 족을 물리쳤다.
아케나텐의 미이라는 2009년 현재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벽화나 조각품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의 얼굴이 궁금한 것은, 그의 행적이 대단히 특이하고 놀랍기 때문이다.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이기에 그토록 엄청난 역사의 페이지를 썼을까? 적어도 여태까지 드러난 모습을 통해서 보자면 그는 특이하게 생겼다.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가 이집트 최고의 미인이었던 데 반해 그는 정말 못생긴 사람이었다. 소위 이집트 판 “미녀와 야수”라고 할 수 있겠다.
브루스 휄만은 2009년 5/6월 호 <예일> 지에 실린 “왕조 진단”이라는 소논문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그의 논문에는 아케나텐의 측면사진이 실렸다. 그것은 주전 약 134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알라바스터상의 측면을 찍었다. 휄만은 예일대 의대 피부과 교수 얼윈 브래버만의 연구결과를 인용했다. 브래버만은 아케나텐이 양성(兩性)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여태까지 발견된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그는 여성처럼 유방이 발달했다. 허리도 가늘다. 엉덩이도 두드러진다. 손매도 곱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전혀 여성적이지 않다. 남자로 쳐도 참 못생겼다. 주걱턱이고 이마는 특이하게 길다. 그러고 보면 브래버만의 말대로 그의 모습에는 여자와 남자가 모두 들어 있는 셈이다. 그것도 아름다운 여자와 야수 같은 남자가.
물론 이런 기현상에 대하여 여태까지 많은 이집트 학자들이 침묵을 지켰을 리가 없다. 그들 대다수의 의견은 대개 이랬다. “아케나텐은 창조신을 섬겼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묘사할 때 여성형이던 창조신의 이미지를 투입시키게 했다.” 그러나 휄만이 제대로 지적한 것처럼 아케나텐 시대의 이집트 예술은 대단히 “자연적”이었다. 어떤 이미지를 강조하지 않고 사실묘사에 집중했다. 말하자면 아케나텐에 대한 묘사도 있는 그대로라고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케나텐의 남녀 혼성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브래버만은 아케나텐의 아들, 딸들, 그리고 제18왕조의 앞선 파라오들을 낱낱이 연구했다. 그 결과 얻은 그의 결론은 이랬다. “고대 이집트 조각가들이나 화가들이 아케나텐과 그 식구들을 묘사할 때 사실주의 입장에서 정확했다.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비정상적인 속성을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것이다.”
2009년 4월 21일, 내과 학회지 Annals of Internal Medicine에서 브래버만과 그의 동료 교수들은 제18왕조의 남성 파라오들과 어린 소녀들에게서 드러나는 비정상적인 유방과 엉덩이 발달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로마타세 과잉 신드롬”이라고 정의했다. 비정상적 유전 때문에 체내에 에스트로겐이 지나치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파라오들의 목소리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아름답고 여성적인 목소리를 자랑했다. 브래버만은 아케나텐과 그의 친척들의 비정상적으로 생긴 이마 모양도 제2차적인 유전적 결함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결론지었다. 다음은 브래버만의 말이다. “실제로 제18대 왕조 멤버들은 이런 모든 문제점들을 야기한 어떤 공통된 변형 유전 문제를 공유했을 것이다. … 이런 우리의 진단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DNA 조사밖에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아케나텐의 미이라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버만은 제18왕조 파라오 중에 여태까지 발견된 다섯 미이라를 한꺼번에 체계적으로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단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당장이라도 연구자금을 확보해서 프로젝트를 설치하고 우수한 인재를 모아 이집트로 달려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집트 제18왕조의 예술이 사실성에 바탕을 둔 묘사가 전체적 분위기였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거기는 맹점이 있다. 왜 그렇게 사실묘사를 전체 분위기로 깔아 놓았을까? 어떤 특별한 동기는 없을까? 아케나텐이 실시한 어떤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집기 위해, 말하자면 그를 격하(格下)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지는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그를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묘사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 사람과 짐승을 한데 묶은 것은 있어도 남자와 여자를 하나의 이미지로 섞은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불교 같은 종교에서 선한 모습으로 격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 있기는 하지만, 아케나텐의 경우는 역겹다. 이런 부정적 이미지 조성이 본래 제작 의도는 아니었을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온 견해, 즉 제18왕조가 여성형으로 묘사된 창조신에 대한 특별한 신앙을 강조했기 때문에 아케나텐과 그의 친척들에 대한 묘사가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는 쉽게 부정된다. 아케나텐이 섬긴 아텐의 성격을 오해한 데서 난 것이기 때문이다. 아텐은 결코 여성적 이미지를 지닌 신이 아니다. 아울러 브래버만과 그의 동료들처럼 아케나텐을 유전학적 분석으로 다 알았다고 말하는 의학자들도 코끼리를 만진 장님에 다름 아니다. 아케나텐에 대한 자료는 “묘사”의 문제지 “유전”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유전학적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당대 예술가들은 궁중에 고용된 하수인 격일 터, 그들은 가능하면 긍정적 이미지 창출을 위해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잔존하는 아케나텐의 자료는 대부분 반 아케나텐 성향을 보인다. 아케나텐의 긍정적 행적을 철저히 파괴하고 그를 매장시켜 버리려고 시도했던 오랜 노력은 거꾸로 그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존재였는지를 도리어 보여준다. 더욱이 그를 여성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은 그가 얼마나 남성적인 존재였는지 역설한다.
그의 미이라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의 미이라는 어쩌면 아주 초기에 파괴 되었을지 모른다. 후계자 네페르티티의 통치가 끝나고 투탕카문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아무래도 그의 무덤파괴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의 미이라를 없애는 것이 주된 목적 아니었을까? 문제의 그 알라바스터상이 제작된 연도를 주목하라. 주전 1345년이다. 이 해는 투탕카문 집권 제3년이다. 당시 투탕카문은 열한 살 대단히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이(Ay)와 호렘헵(Horemheb) 같은 세력권자들에 의해 조종당한 종이호랑이였다. 최근에 발굴된 투탕카문의 이미지들과 비교해 보라.
투탕카문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 못지않게 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 저들 이집트 궁중 예술가들은 아케나텐을 등신으로 묘사하는 한편 투탕카문을 소위 “꽃남”처럼 그려냈다. 여성적 이미지의 꽃남이 아니라 장동건 스타일의 꽃남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투탕카문은 누구의 아들인가? 아케나텐 아닌가? 그의 어머니 키야의 아름다운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투탕카문의 모습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변형시키기 이전의 아케나텐을 회복하는 방법은 없을까? 투탕카문과 키야를 늘어놓고 상상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현실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케나텐이 강했고 투탕카문은 연약했다. 아케나텐이 남성적 이미지를 풍겼고 투탕카문은 연약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실시한 정책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자주 예술은 현실을 뒤집어 표현해 오지 않았던가!
1907년 1월, 에드워드 아이르톤은 테도도르 데이비스의 지휘 아래 왕들의 계곡 발굴팀에서 일했다. 제55번째 무덤을 발굴하던 중에 심하게 물로 부패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리쉬(rishi) 타입의 관 하나가 관심을 끌었다. 심하게 지운 자국이 선명해서 누구의 관인지 알기 어려웠다. 데이비스는 그것이 여성의 관이라고 보았고, 아케나텐의 어머니 타이(Tiy)라고 발표했다. 나중에는 그것이 아케나텐이라고 수정되었다. 그렇지만 다시 연구를 계속한 결과, 그것은 스멘크카레라고 인정했다. 같은 미이라를 놓고 이렇게 여성에서 남성, 남성에서 다른 남성으로 결과가 바뀐 까닭은 무엇인가?
여성형으로 제작된 관은 키야를 위해 마련되었고, 실제로 그 안에 들어있는 미이라의 주인공은 스멘크카레였다. 이 무슨 뜻일까? 이 둘이 하나로 결합하면 “스멘크카레는 여성”이라는 결론이 난다. 이 여성 스멘크카레는 결국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가 파라오로 등극하면서 얻은 새 이름이라는 또 다른 결론도 거기서 난다.
본래는 같은 묘지에 아케나텐의 어머니 타이(Tiy)와 아케나텐, 그리고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가 안치되었다. 투탕카문 당시 그의 사주를 받은 역사왜곡자들은 타이와 네페르티티의 미이라를 꺼내고 아케나텐의 미이라에 수로를 대어 파괴시키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랬는지 그들은 실수하고 말았다. 그들이 무덤에서 꺼낸 것은 아케나텐의 미이라였다. 꺼낸 후 다른 곳에 묻었다면 “왕들의 계곡”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어딘가에 아케나텐의 무덤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실수가 아니라면, 무덤 파괴자들은 아케나텐의 미이라를 파괴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없애버렸을 것이다. 아케나텐의 미이라를 물로 침수시켜 썩게 하려고 했는데, 썩은 것은 그의 스멘크카레, 곧 네페르티티의 미이라였다.
아케나텐 이 제18왕조의 여러 파라오들과 다른 친척들에게서 두드러진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행했던 독특한 사건, 즉 “일신주의 개혁”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금 현존하는 아케나텐에 대한 그림과 조각은 모두 후대에 만든 것이다. 그 당대의 것들은 이미 제거되었다. 후대에 묘사한 아케나텐은 그저 “제18대 왕조의 사람”일 뿐이었다. 게다가 투탕카문을 제거한 아비도스와 카르낙 리스트는 아케나텐도 제거 대상에 포함시켰다. 구체적으로 아케나텐부터 네페르티티와 투탕카문까지, 그리고 아이(Ay)까지 모두 없애버렸다. 그 리스트는 제9대 파라오 아멘호텝 3세부터 제14대 파라오 호렘헵으로 건너뛴다. 제10대 아케나텐, 제11대 네페르티티, 제12대 투탕카문, 그리고 제13대 아이까지 네 명의 파라오가 그 공식명단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열쇠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헵이 쥐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는 종교개혁이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고, 투탕카문은 그 종교개혁을 원점으로 돌리는 반개혁적 개혁의 허수아비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었고, 아이는 내부 권력투쟁 탓이었을 것이다.
이집트 제18왕조 제10대 파라오 아케나텐의 종교개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전 1477년 발생한 출애굽 사건이 73년이나 지난 후에 집권한 그는 확실히 그 다음 세대였다. 그렇지만 그는 모세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집트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섬긴 아텐(Aten)을 여호와를 음역한 “아도나이”(Adonai)와 어떻게 일치시켜 보려는 시도도 있지만 근거가 박약하다. 도리어 “창조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에 대한 이집트식 해석에 따라 기존의 많은 이집트 신들 중에 가장 유사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케나텐은 그의 통치 제5년, 즉 1360년에 오늘 텔 엘-아마르나로 불리는 아케타텐(“아텐의 수평선”)에 수도를 옮기고 신전을 세웠다. 태양신 아텐은 “강한 남성적 이미지”를 품었다. 너무 강한 나머지 일반 백성들은 아텐을 직접 숭배할 수도 없었다. 단지 왕족들만 아텐의 생명부여 능력을 혜택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아텐만 섬기기로 한 아케나텐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아케나텐은 이집트 전역을 개혁의 도가니로 바꾸어 버렸고, 과감한 천도까지 단행했다. 그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역대 파라오 중에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를 여성적 이미지로 묘사한 것은 말하자면 “왜곡”이다. 한 개인만 왜곡한 것이 아니라 그의 결단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역사화 된 새로운 물결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피나는 노력에서 난 “역사왜곡”이다. 이런 종류의 역사읽기를 오늘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만난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4. 모세와 요시야
아스만(Jan Assmann)은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 이집트학 교수다. 그는 하바드 대학 출판사를 통해 <이집트인 모세>(Moses the Egyptian)를 출간했다. 1997년이었다. 여기서 그는 모세가 유일신 개혁을 시도한 인물이라는 점을 놓고 논의를 시작한다. 우선 그는 모세가 역사적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성경 외에 이집트 안팎에 그를 언급한 자료가 없는 것이다. 모세는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기억의 인물이다. 말하자면 모세의 역사성 자체는 대단히 큰 의문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전통은 대단히 분명하다는 말이다. 반대로 이집트 제18왕조 파라오 아케나텐은 역사적으로 유일신 개혁을 실시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케나텐은 곧 역사에서 잊혀졌다. 의도적인 역사왜곡 과정을 거쳐 철저하게 고대 이집트 역사책에서 지워져 버린 것이다. 아니 아케나텐을 다뤘던 여러 페이지가 몽땅 찢겨져 나갔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을 두고 아스만은 모세와 아케나텐을 이렇게 비교한다. “모세는 기억의 인물이지 역사의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아케나텐은 역사의 인물이지 기억의 인물은 아니다.”
여기서 아스만은 이집트의 아케나텐을 이스라엘의 모세와 비교한다. 그는 아케나텐을 제18왕조의 인물로, 모세를 제19왕조 때의 사람으로 본다. 이런 연대기적 전제를 근거로 모세는 결코 유일신 개혁을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모세 앞에는 아케나텐이 있다. 모세는 아케나텐을 본 딴 것이다.
나는 그가 전제하고 있는 이집트 연대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세가 이끈 출애굽 사건은 주전 1437년이다. 아케나텐이 집권한 해는 주전 1364년이다. 아케나텐이 파라오로 등극한 해는 출애굽 사건 이후 73년이 지난 때다. 따라서 모세가 아케나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케나텐이 모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케나텐의 개혁이 출애굽 사건에 끼친 영향을 말하지 말고 출애굽 사건이 이집트에 남긴 영향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후폭풍 같은 임팩트를 남겼고, 그 결과 아케나텐의 유일신 종교개혁으로 폭발한 것이다.
백 걸음 양보해서 모세가 아케나텐보다 후대라고 치자. 그렇다면 모세의 유일신 개혁은 이집트의 종교생활과 어떤 점에서든지 동질성이 더 강하다. 모세의 여호와 신앙은 그 뿌리가 이집트 내에 있다는 말이다. 치고 나갈 이유가 어디 있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땅 가나안으로. 그것도 사막을 통과해서!
출애굽이 이집트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중요하다.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뒤흔든 사건이 이집트 내부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다. 이집트 백성들이 보물을 꺼내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도왔는데, 그게 어떻게 쉽게 잊혀질 수 있을까?
결론으로, 출애굽의 여파로 이집트 내부에 유일신 개혁이 일어났다. 비록 그 개혁은 제3대에 이르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유일신 정신은 아주 사라지고 만 것은 아니다. 수면 밑에 잠수했을 뿐이다.
1908년 어느 날, 독일의 언어학자 자코(E. Sachau)는 이집트의 엘레판틴 섬에서 두 해 전에 이미 발견된 아람어 파피루스 기록을 검토하던 중이었다. 그때 그는 이 섬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이 이미 서기전 5세기 페르시아 시대에 신전을 건설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예루살렘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거처인데 또 다른 신전을 그것도 이방인 지역에 만들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엘레판틴의 유대교 신전 문제가 학자들 사이의 논란거리가 됐다.
내 추론은 이렇다. 이집트 내부에 존재하던 유일신 사상의 잔재다. 아니, 아케나텐 류의 유일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떠나고 나서 단지 “유일신”이라는 하나의 종교적 현상이 남은 것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신앙” 자체가 남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셨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집트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을 품었다고 여러 차례 지적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이스라엘만 빼내가고 초토화(焦土化)하는 데 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다녀간 이집트에도 구원의 손길이 펼쳐져 있다. 생각해 보자. 이집트 백성들은 소수의 정권 잡은 자들(파라오들)을 빼놓고는 대개 하나님의 뜻에 협조했다. 이집트 산파들이 파라오의 명령을 거역했다. 이집트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귀중품을 선물로 주었다. 그들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대상은 넓다. 땅 끝이다. 구원의 방법도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 예수님의 이름이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이 말씀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이집트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아케나텐의 개혁을 통해 그 사실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Nefertiti)는 아케나텐의 누이다. 그녀는 우선 미모로 유명하다. 그녀는 또한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국이 그녀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녀는 종종 파라오 왕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녀가 어떤 정치적 결정을 내렸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아직까지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관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거나 전차에 올라 적을 물리치는 모습 등이 그려진 것과, 심지어 남편과 나란히 서서 종교적 행사를 주관하는 그림 등에서 그녀의 세력을 가늠할 수 있다. 권력과 미모를 동시에 지닌 그녀는 생전에 여신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그녀는 패션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대에 유행하던 복장을 입었다.
아케나텐은 통치 말년에 스멘크카레(Smenkhkare, 주전 1351-48)과 공동통치 했다. 스멘크카레, 그는 누구인가? 일부 학자들은 그가 아케나텐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네페르티티가 바로 스멘크카레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발견된 미이라의 관이 여성용이라는 것이었다. 그 관은 독수리 깃털로 장식되었다. 독수리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수면 위에 운행하셨을”(창 1:2) 때, 그 이미지는 독수리의 비행이었다. 이집트 내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다는 증거 아닐까! 그 관은 심하게 물 때문에 부패했다. 누군가 파괴할 목적으로 일부러 수로를 댄 것이다! 틀림없이 투탕카문을 배후에 조종했던 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름을 스멘크카레로 바꾸고 스스로 파라오가 되어 통치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18대 왕조는 두 명의 여자 파라오를 낳은 것이다. 하나는 제6대 핫셉수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11대 스멘크카레다. 스멘크카레의 통치는 겨우 2-3년으로 대단히 짧았다.
이후 권력은 아케나텐의 첩의 아들인 투탕카문(Tutankhamn, 1347-37)에게 넘어갔다. 투탕카문 때 아케나텐이 세운 신전 대부분이 파괴되고, 이집트의 오랜 전통이 다시 회복되었다. 이렇게 보면 스멘크카레를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로 보아 무리가 없다. 부부의 공동통치로 세운 것들이 모두 서자(庶子) 투탕카문의 통치 때부터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케나텐의 유일신 개혁의 성격을 다른 각도에서 모세와 비교해 보자. 아케나텐의 아텐/아톤은 태양신이다. 다른 신으로도 “번역”(飜譯)이 가능한 신이다. 새삼스럽게 파괴적 능력이 없다.
이쯤해서 “신명 번역”(神名飜譯)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스의 많은 신들은 로마의 다른 신들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헤라(Hera)는 로마의 유노(Juno)다. 헬리오스(Helios)는 솔(Sol)이다. 에로스(Eros)는 큐피드(Cupid)다. 오스(Eos)는 오로라(Aurora)다.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베누스(Venus), 곧 비너스다. 아폴론(Apollon)은 포에부스(Phoebus)다. 곧 아폴로(Apollo)다. 아테네(Athena)는 미네르바(Minerva)다. 이제 묻자. 모세와 이스라엘이 섬긴 여호와 하나님이 이전의 어떤 신의 번역인가? 다른 한편,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언어로 번역된 일이 있는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대의 어떤 신과도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신명(神名)은 다른 어떤 언어로도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다른 모두는 신이 아니다. 우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생명을 주신다. 다른 신들은 스스로도 생명이 없다. 그러니 생명을 창조하거나 주거나 할 수 없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 20:3; 신 5:7)는 계명은 어떤 종교에서 그저 “유일신을 섬겨라”고 주장하는 것과 그 성격이 같을 수 없다. 여호와는 여호와시다. 다른 그 어떤 신으로 번역(飜譯)되거나 치환(置換)될 수 없다. 따라서 모세의 여호와 신앙은 근본적으로 다신교 사회인 이집트 컨텍스트에서는 출애굽함으로써만 그 예배적 실천이 가능했다. 아케나텐의 아텐 신앙은 이집트 내에서 천도(遷都)함으로써 가능했었다. 아텐은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금문교회 도서관에 투탕카문 동상이 있다. 중국에서 만들었다. 허리에 양손을 대고 가슴을 넓게 연 전신(全身)이다. 온 세상을 향한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한 젊은이다. 투탕카문, 그는 정말 젊은 파라오였다.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년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살해되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제작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작고 조잡한 무덤에 안장한 사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예술가들의 조명을 받고 있는 투탕카문의 모습은 사실은 조작된 것이다. 그런 자신감과 그런 파워는 부여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확실히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신의 권력이 아니라 섭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전왕 아케나텐과 스멘크카레의 정치-종교적 성과물들을 대부분 없애버렸다. 투탕카문 자신은 비록 서자의 신분이기는 아지만 분명히 아케나텐의 아들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정책을 그렇게 과감하게 부정할 수 있었을까? 어린 나이라는 사실 외에 섭정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투탕카문은 아케나텐과 소실 키야(Ki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키야에 대해서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의 관이 의도적으로 심하게 손상되어서 그 이름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케나텐의 관으로 착각하고 칼 같은 것으로 마구 그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케나텐의 소실이며 투탕카문의 어머니인 키야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카이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키야의 두상은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와 비교하기 어려운 것은, 둘 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케나텐은 미인들을 정실과 소실로 얻었다. 그는 네페르티티 사이에 난 딸 안케세나문과 결혼했다. 말하자면 그의 아내는 그와 배 다른 누이였다.
투탕카문의 섭정자들은 아이(Ay), 호렘헵(Horemheb), 마야(Maya) 등이다. 이들은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멤피스(Memphis)로 옮겼다. 여기서 아케나텐 때 파괴했던 신전들을 복구했다. 테베(Thebes)는 다시 한번 이집트의 종교 센터로 복구되었다. 아문-라(Amun-Ra)는 신들의 신으로 다시 추앙되었다.
투탕카문이 죽고 나자 실권자였던 아이(Ay)가 파라오로 등극했다. 그는 아케나텐의 삼촌으로, 투탕카문의 서기관 출신이었다. 그는 투탕카문의 미망인과 결혼하고 파라오가 되었다. 호렘헵(Horemheb)은 군대의 장관이었다. 그는 아케나텐 때부터 군대에 입문, 고위직에 올랐다. 아이(Ay)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했다. 실제적인 권력자였는데, 아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파라오에 올랐다. 제18대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였다. 그가 파라오로 집권하면서 이집트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아쉽게도 호렘헵은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 그것이 람세스 1세가 제19왕조를 여는 하나의 계기를 준 것은 확실하다. 마야는 투탕카문의 재무담당관이었다. 그는 아이나 호렘헵과 달리 파라오에 오르지 못했다.
투탕카문, 그는 아마르나 세대 마지막 통치자였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섭정들의 손 아래서 채 정치를 알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실제로 이룬 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시대적 의미”를 지녔다. 말하자면 이병주가 <지리산>에서 말한 것처럼 “존재함으로 일하는” 인간형이었던 셈이다. 아케나텐이 다신교 사회를 일신교 사회로 개혁하여 고대 이집트 역사의 수레바퀴 방향을 돌려놓았는데, 투탕카문 때 그 바퀴가 다시 제 궤도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 이집트 내에서 그 수레는 결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어떤 중요한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소위 “회복의 돌비”(Restoration Stela)가 그것이다.
남신들과 여신들의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엘레판틴부터 델타의 습지대까지 이르도록
그들의 거룩한 자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경이다.
쓰레기 더미로 변했고, 엉겅퀴가 높이 자랐다.
그들의 성소들은 전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 버렸고
그들의 거처들은 짓밟혀 아예 길이 되고 말았다.
그 땅은 질병의 공동묘지가 되었고
그 신들은 이 땅을 버리고 말았다.
어떤 군대를 시리아로 보내어 이집트 경계를 넓힐 목적이었다면
성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신에게 도움을 청했더라도
그 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여신을 그렇게 찾았다고 해도
그녀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은 지친 몸과 함께 약해져 갔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창조되었던 그것을 파괴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케나텐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할 이집트의 운명을 새긴 것이다. 이 정서는 통치자들은 물론 백성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졌고, 이집트는 두 번 다시 아케나텐 같은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 엘레판틴에 “여호와의 신전”이 발견되기까지. 그러나 그것도 그 배경이 모호하다.
비슷한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유다의 왕 요시야(주전 640-609)를 주목할 이유가 있다. 여덟 살 때 왕이 된 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개혁했다. 투탕카문은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어쩌면 이것은 당파주의의 다이나믹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시야는 지혜롭게 그를 극복했고 투탕카문은 그 희생자로 남았다. 이스라엘과 유다처럼 당파주의의 극한 단련을 받은 나라에서는 요시야 같은 지도자가 날 수 있지만, 이집트 같은 강대국에서는 그런 묘수가 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당파주의라는 정치적 장치 말고, 말씀의 능력을 말해야 한다. 요시야는 말씀을 발견했다. 그러나 투탕카문에게는 말씀이 전달되는 은혜가 없었다. 투탕카문의 비극의 열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설령 아케나텐의 유일신 개혁이 그 강도(强度)에 있어 모세의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개혁과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해도 적어도 이집트 내에서 그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러므로 투탕카문은 아케나텐의 흔적을 지우는 데 전력을 다했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라져 갔던 것이다! 본래 그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아케나톤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허수아비였던 셈이다.
5. 전쟁이후
신들의 전쟁은 언제나 인간의 전쟁으로 끝난다. 아니, 처음부터 인간의 전쟁이었다. 인간이 신의 가면을 쓰고 나선 전쟁일 뿐이다. 전쟁의 피해는 인간이 본다. 젊은이가 피를 흘리고, 여자들이 쓰러졌다.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연기 속을 헤집고, 노인들이 가슴을 뜯는다. 이게 전쟁이다.
한반도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한쪽의 오판만으로도 언제든지 전쟁 재개가 가능하다.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한반도는 인명은 물론 그동안 쌓아올린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것이다. 한반도의 위기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길은 통일뿐이다. 통일비용이 심각할 것이다. 북한의 인구 대부분은 한 세대를 굶주렸다. 저들은 육체 뿐 아니라 정신적 판단력에도 문제(damage)가 생겼다. 통일이후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사회보장제도” 안에 “즉시” 포함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통일 한국의 경제는 순간적으로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통일비용이다. 더욱이 지역 간의 갈등도 이전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계층 간의 위화감도 상상을 넘어설 것이다. 역사에서 소중한 것은 값을 치르지 않고 결코 우리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배웠다.
지금 통일을 말하는 개인의 수는 적다. 어떤 단체도 통일을 깃발 걸어 내세우지 않는다. 정치적 구호에서 통일을 이미 매력을 잃었다. 표와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몫이다. 성전에서 발견한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주제는 “세 가지 하나”(three ones)다. 곧, 한 하나님, 한 성전, 한 백성이다. 이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 예루살렘만을 성소로 인정함, 그리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하나 되는 “통일된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신명기역사(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까지)의 주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허락하신 땅 가나안에서 분열과 파멸을 경험하고야 만 이스라엘을 따라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말하자면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한반도 통일은 요시야처럼 성경을 바탕으로 한 개혁으로 가능하다. 요시야 개혁은 필히 한 하나님, 한 성전/교회, 한 민족을 말한다. 첫째로, 오늘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다른 모든 신들은 결국 “물질신”이다. 물질은 다스려야 하지 경배의 대상은 아니다. 둘째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 양적 성장이라는 허무한 목표를 세우고 각개전투(各個戰鬪)하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셋째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다. 통일은 한 하나님을 모시는 하나 된 교회가 주체세력이다. 통일의 길에 정치적이고 경제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교회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엘레판틴의 신전 문제로 돌아가 보자. 모세와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났지만, 아케나텐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이집트 사람들에게 남긴 여호와 유일신 신앙의 영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에 이집트를 겨냥한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이사야는 그중에 가장 탁월하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5:22-23, 개역
지금이 그때라고 믿는다. 수 천 년 동안 모래바람만 지나갔던 이집트 광야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발자국이 새겨져야 할 때다. 요셉이 걸었던 길, 출애굽 이스라엘이 끝도 없이 걸었던 길, 그 길 위에 복음 전도자의 발자국이 새겨져야 할 때다.
역사의 방향을 과거로 돌려, 철옹성 같던 앗시리아의 추락과 신흥 강대국 바빌로니아의 기흥, 이집트의 도발 등으로 앞날을 알 수 없던 시대에 여호와 유일신앙으로 성전과 나라를 개혁하고, 끝내 남과 북을 통일한 왕 요시야를 만날 수 있다. 요시야는 개혁의 범위를 예루살렘에서 유다, 그리고 당대에 이미 100년 전에 앗시리아의 말발굽 아래 멸망해 버린 땅 북 이스라엘 전역까지 확대했다. 그가 최후를 맞이한 므깃도는 북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에서 가까웠다. 말하자면 요시야는 솔로몬의 사후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던 나라를 꼭 300년 만에 재통일 시켰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말씀을 발견했고, 그 말씀 앞에 옷을 찢고 회개한 후, 말씀에 바탕을 둔 철저한 개혁을 실시한 결과였다. 여호와 유일신앙을 회복한 지도자 “요시야”와, 그가 통일한 “이스라엘”은 메시야니즘의 역사신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 전반부와 후반부에 성전청결을 실시하셨다.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아우르는 사역을 실천하셨고, 그것을 바탕으로 “땅 끝까지 가는” 선교를 당부하셨다.
요시야의 개혁으로 이룬 남북통일은 오늘 어느 때보다 긴장 높은 한반도의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의 행간이다. 말씀대로 살면, 그대로 순종하며 개혁을 하면,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통일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한반도 통일을 바탕으로 말씀을 들고 우리는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는 선교한국의 비전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오늘 한반도의 통일을 진정으로 구하는 사람들은 말씀 앞에 자기 옷을 찢는 요시야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이 시대는, 특히 미국은 “가능한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복잡다단한 세상이다. 관용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평등이라는 거역하기 정말 어려운 정치 슬로건으로,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인정한다. 동성애가 정상으로 인정되고 동성결혼이 합법화 되는 추세다. 이런 물결에 샌프란시스코가 앞장섰다. 이건 정말 아니다. 흰 말을 붉다고 말할 수 없다. 흰 것은 흰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혼란은 새로운 창조의 기회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를 개혁하고 퇴로를 차단하고 협상카드를 버리고 그 대신 무릎을 꿇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일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사용하셔서 새로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물을 흐르게 하실 것이다.
투탕카문의 유물 전시는 내년 3월까지다. 거기서 우리는 투탕카문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섭정자들이 손길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이 어린 투탕카문을 앞세워 없애려고 힘썼던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의 유일신 개혁 흔적을 더듬어 볼 것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케나텐이 배우려고 꿈꾸고 상상했던 인물, 모세의 그림자를 추측해 볼 것이다. 모세가 떨기나무 타는 불꽃 가운데 만나 뵈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억압 중에 신음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하셨다.
드영뮤지엄에서 혼합된 신들의 세계 이집트를 떠나 참 예배를 드리게 하셨던 유일한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가 들인 시간도 물질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거기서 우리는 미국은 물론 세계로 번져나가는 혼합종교의 위기를 타개하는 “하나 되게 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볼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보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말씀의 은혜에 흠뻑 젖는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모세가 기록한 오경과 요시야 때 일차 편집한 신명기역사서, 곧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까지를, 그리고 복음서 중에 하나, 말하자면 요한복음을 기도 중에 미리 읽고 간다면 이 모두는 정말 가능한 시나리오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길이 없다(행 4:12). 구원의 길이 막혀 있던 인간 모두에게 생명의 빛을 주셨다. 온 세상이 사망의 권세 아래 있어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죄의 삯은 사망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셨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구원의 길”을 보는 사람이 맞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에서 땅 끝까지 전파되는 복음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이 건강하다.
복음은 다른 종교와 문화 아래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초청하는, 대단히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참 사랑의 메시지다. 아케나텐은 배타적인 아텐 숭배를 위해 아마르나로 천도했다. 참 신이 아닌 유일신 개역은 자리를 옮기는 그 정도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온 세상을 품는다. 요시야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회복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우리를 파송하셨다. 인종과 민족, 나라와 문화를 따로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참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모두 한 형제요 자매다.
신들의 전쟁 이후, 지금은 선교의 때다. 땅 끝으로 달려가는 복음 전도자의 발길이 분주하다. 지금은 지난 역사에서 피로 뿌린 씨앗을 이제 추수할 때다. 지금은 선교의 때다.





